<Weekly 경향>은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라는 주제로 2010년 연중기획을 진행한다. 1960~197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이룬 경제 성장의 기틀이지만 그 뒤에는 ‘빨리빨리’로 상징되는 압축적 근대화 과정의 부작용이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1970년에 완공돼 우리나라 산업화의 이정표가 된 경부고속도로도 마찬가지다. 경부고속도로는 분명 한국 경제 성장의 탄탄한 밑돌이었지만 초대형 공사에 뒤따르는 여러 가지 사회적 후유증을 낳았다. 김호기 교수가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을 방문하면서 지난호 박태균 교수에 이어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박정희 시대의 의미를 짚어 봤다. <편집자 주>

“차창에 기대어 / 추풍령을 넘으면 // 거기 낙엽이 지는 계절이 / 늙은 산맥에 경사지고 / 인생과도 같은 외로운 풍경은 / 언젠가는 나도 돌아가야 할 / 그날의 적막처럼 / 긴 차창에 연속하였습니다. // … // 천 구백 오십 이년 십이월 / 정오의 태양이 파란 가슴에 고여들고 // … // 사랑이라는 것은 이와도 같이 / 외로운 시절의 편지라고 생각에 잠겨 갔습니다.”

197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닐 때 문예반 활동을 했다. 10대일 때 누구나 대부분 그렇듯이 감상적인 작품에 먼저 눈이 가게 된다. 당시에 읽은 시 가운데 인상적인 작품의 하나는 조병화의 ‘차창(車窓)’이었다.

어린 나이에 내가 주목한 것은 시인의 진술 시점이 1952년 겨울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직 한국전쟁이 진행 중인 때였다. 전쟁 한가운데서 노래한 사랑은 한편에선 낯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의미가 선명히 부각되기도 한다.

젊은 시절에는 아무래도 역사와 사회라는 사회구조적 조건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나이가 들면 그 구조적 조건의 이면에 놓인 개인적 감성과 의지에 더 관심이 가게 된다. 전쟁 한가운데서도 사랑은 피어나는 법이며, 삶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닐 것이다.

‘길의 역사’에서 결정적 전환점 제공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올 겨울 추위가 절정에 달한 지난 1월 19일 이른 아침에 추풍령으로 가는 도중 부지불식간에 이 시에 나오는 추풍령이 떠올랐고, 이 글을 쓰면서 기억 저편으로 밀어 둔 이 시를 찾아 봤다.

이번에 찾아가기로 한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이 바로 추풍령에 있다. 양재 인터체인지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면서 새삼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차가 다니던 시골길이 자동차가 달리는 신작로로 대체되고, 이것이 다시 고속도로로 변화해 온 것이 길의 역사였듯이 길은 현대성(modernity)의 상징을 이뤄 왔다. 지난 우리 현대사를 돌아볼 때 길의 역사에서 결정적 전환점을 제공한 것은 1970년 경부고속도로의 완공이었다.

전태일이 분신한 1970년 바로 그해에 박정희 정부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이 주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산업 생산 및 유통에서의 혁신은 물론 전국을 말 그대로 1일 생활권으로 묶는 결과를 가져 왔다. 산업화가 본궤도에 올라섰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특징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줬다. 한마디로 그것은 ‘하면 된다’는 리더십이었다. 긍정적으로 보면 성취지향적 리더십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권위주의적 리더십이다. 수출지향 산업화, 중화학공업 육성, 새마을 운동, 의료보험 실시 등이 바로 이런 리더십으로 추진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시대의 연구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경제 성장 및 권위주의 정치체제와의 일종의 ‘선택적 친화성’문제다. 가치 판단 관점에선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권위주의를 비판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사실 판단 관점에선 독일과 일본의 후발산업화 과정이 보여 주듯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불가피성을 주목할 수도 있다.

경제성장의 빛과 권위주의의 그늘
물론 후발산업화의 역사적 경험에서 독일과 일본 모델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칸디나비아 모델로 대표되는 유럽 강소국들은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의 병행 발전을 추구했고 또 성공했다. 바로 이 점에서 박정희 정부가 추구한 국가 주도 산업화에는 아쉬움이 결코 작지 않다.

추풍령을 오가면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것은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이 시대의 중요성을 증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박 대통령만큼 문제적인 인물은 없을 것이다. 1979년의 그가 돌연한 죽음을 맞은 이후 벌써 30여 년이 흘렀건만 그의 시대를 둘러싼 논란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었다.

박정희 시대는 명암이 뚜렷한 시대다. 우리사회를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변화시키는 고도성장을 가져온 시대인 동시에 정경유착, 인권탄압, 민주주의 후퇴 등 또 다른 대가를 요구한 시대였다. 무엇보다 박정희 시대에 뿌리내린 성장주의와 군사문화로 대표되는 권위주의는 우리사회의 심층의식을 이뤄 왔다.

박정희 시대가 이렇게 선명한 명암을 갖는 것임에도 박 대통령과 그의 시대에 대한 향수는 왜 끊이지 않는 걸까. 그것은 최근 우리사회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 양극화가 강화되고 적지 않은 국민들이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라면 이런 삶의 불안정성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바로 그곳에 강력한 리더십으로 상징화된 대통령 박정희가 존재한다. 박정희식 모델이 옳아서가 아니라 현재의 곤궁(困窮)이 과거를 그리워하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 주목할 것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정치적 독법(讀法)이다. 박정희 시대는 30년 전에 마감했지만 이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현 정치 세력들의 정당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왔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과도한 이분법이 강조되는 것도, 이 시대에 대한 과거사 규명이 크게 논란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과잉정치적 역사 해석은 과거에 대한 해석에서 현재적 잣대를 지나치게 특권화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합리적인 성찰을 가로막는다.

역사의 해석에서 합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역사를 보는 눈은 복수(複數)일 수 있으며, 열려진 토론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이끌어내는 게 바람직하다. 이 점에서 박 대통령의 리더십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박정희 시대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 해석이 아닐 것이다. 30년 넘는 시간이 그 상처를 다스리기에는 짧은 시간일지라도 박정희 시대에 대한 더욱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박정희 시대를 생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같은 나이의 아버지 삶을 떠올릴 때가 없지 않다. 1970년에 아버지의 나이는 마흔 일곱이었다. 지금 내 나이보다 세 살이나 젊으셨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어린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시골길을 달리곤 했다.

그때 아버지로부터 박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적잖이 들었다. 물론 긍정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의식이 들면서부터 대통령이던 박정희는 내가 대학교 1학년 때까지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 박정희를 제외한 다른 대통령은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아버지와 내가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이상 나누지 않은 것은 대학에 들어와서부터였다. 장준하의 <돌베개>를 읽고, 황석영의 <삼포로 가는 길>을 읽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은 나로서는 아버지와 박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고 해서 박정희 시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시대가 만들어 놓은 발전주의적 ‘61년 체제’는 신자유주의적 ‘97년 체제’가 등장한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 왔다. 4대강 사업을 포함한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발전주의’의 한 축도 다름 아닌 박정희 시대의 발전국가론에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탑을 보기 위해 금강휴게소에 들렀다. 박태균 교수와 함께 휴게소 반대편 언덕 위에 세워진 위령탑을 돌아봤다. 서울로 오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데 저 아래 경부고속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돌아보면 저 멀리 추풍령이 있고 시선을 다시 돌리면 이쪽에는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가 길게 뻗어 있다. 발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떠오른 것은 어린 시절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아버지 허리를 꽉 부여잡고 시골길을 달릴 때였다. 아버지는 옛가요 ‘추풍령’을 더러 흥얼거리시곤 했다.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 … /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그립구나, 추풍령 고개.”

역사는 무엇인가. 거시적 구조의 역사를 말함이 아니다. 미시적 개인의 삶 속에도 역사는 찬란히 숨을 쉬고 있다. 서울로 가는 곧게 뻗은 고속도로처럼 아버지가 살아온 역사에 이어 내가 살아가는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아버지의 나이가 돼서야 아버지의 심사를 이해하고, 그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생각에 여전히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대한 향수가 현재의 해법 아니다
박정희 시대는 우리 역사와 우리 사회에서, 무엇보다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 과연 무엇이었는가. 빛과 그늘이 너무나 뚜렷한 이 시대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도, 나의 생각도 전적으로 옳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현대사의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들이 숨쉬고 있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그 속에 담겨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21세기에 박정희 시대의 발전 모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다. 흘러간 것은 흘러간 것이다. 지나간 것에 대해 향수에 젖는다고 해서 과거의 방법이 현재의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복잡다단한 문제들은 박정희 시대의 성장주의나 권위주의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박정희 시대를 넘어서서 새로운 발전 모델을 일궈가야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부여된 시대적 과제일 것이다.

원고를 정리하면서 보니 한나라당 일각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이뤄졌다고 해서 화제다. 비판의 문맥은 물론 세종시 논란이다. 원안을 고수하는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일 터다. 한나라당이라고 해서 박 대통령을 비판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하게 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지만 현재를 이기는 과거는 없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